2009/01/03 18:26
| 高建 前
국무총리 손미나 KBS 아나운서 이창호 프로기사 9단 尹潤洙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회장 柳在乾 국회의원 金在衡 드라마 PD 금난새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朴淸秀 원불교 교무 鄭晉錫 한국외국어大 명예교수 車錫勇 LG생활건강 사장 진행·정리 : 李相姬 月刊朝鮮 조사담당 〈gwiwon27@chosun.com〉 |
||
|
멘토(Mentor)는 인생살이의
선배나 정신적 스승을 뜻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끌어 주는 후견인이란 의미로 널리 쓰인다.
공직 선배 김수학 (高建) 바른 길을 알려준 아버지 (손미나) 內弟子로 받아준 스승 曺薰鉉 (이창호) 내 인생의 등대인 아내 (尹潤洙) 세 선생님 (柳在乾) 최창봉 KBS 드라마 국장 (金在衡) 케네디 美 대통령 (금난새) 신앙의 길을 열어 준 어머니 (朴淸秀)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裵說 (鄭晉錫) 꾸밈없이 정직했던「론」부장 (車錫勇) ▣ 공직 선배 김수학 「매일 매일이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아라」 高建 前 국무총리 1938년 서울 출생. 경기高·서울大 정치학과 졸업. 서울大 환경대학원 석사. 美 MIT大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서울大 총학생회장, 전라남도 지사,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 교통부 장관, 농림부 장관, 12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 명지大 총장, 민선2기 서울시장, 국무총리, 대통령권한 대행 역임. 現 명지大 석좌교수, 헤리티지재단 자문위원, 美 시러큐스大 이사. 國卒의 내무부 지방국 기획계장 ![]() 『누구의 사람이라는 이야기 듣지 마라』 공직에 나선 내게 아버지께서 내려 주신 「공직3戒(계)」 중 하나다. 오로지 일로써 승부하고 절대 연줄에 기대지 말라는 말이다. 나는 이 계율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실천을 통해서 이 계율의 모범을 보여 준 것은 공직사회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만나게 된 김수학 선배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도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생활은 총학생회장이 되어 「학생 정치」를 하면서 보냈다. 그러나 졸업할 무렵 부패한 자유당 말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치가가 아니라 공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졸업 후 고시를 봤는데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할 수 없이 신혼생활을 접고 수락산 아래 흥국사에서 한 겨울 재수한 끝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마침 첫아이가 태어난 날이 시험날이었다. 목민관인 군수가 되려고 내무부를 희망해서 지방국 행정과 수습 사무관 발령을 받았고, 기획계로 배속됐다. 기획계는 지방자치제도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기획계장이던 김수학 선배를 처음 만났다. 나와 직급은 같았지만, 김수학 선배는 여러모로 애송이인 나와 대비되는 대선배였다. 나이도 10년은 위였을 뿐 아니라 말단 지방공무원부터 공직을 밟아온 터라(金선배는 國卒 출신이었다) 일선 경험이 풍부했다. 지방국 행정과는 전국의 지방행정을 총괄하는 곳이라 일이 많았다. 지방출장을 여러 번 함께 다녔다. 나는 金선배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통금까지 일하는 것은 예사이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아예 밤을 새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무원에게 유일한 해방일은 섣달그믐날이다. 종무식이 끝나면 모두 책상을 치우고 퇴근한다. 그러나 金선배는 예외였다. 종무식이 끝나자 다시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해가면서 무엇인가 몰두해서 일하는 것이었다. 소탈한 성격의 金선배는 공직 초년병인 내게 따뜻했다. 일이 끝나면 함께 밤늦도록 막걸리,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이 많았다. 안주래야 멸치에 김치 쪼가리, 그리고 金선배의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전부였지만 분위기만큼은 좋았다. 이때 이후로 멸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주가 되었다. 당시 金선배는 자주 이사를 했던 것 같다. 한번은 늦게 소주 모임을 끝낸 金선배가 새로 이사한 자기 집을 못 찾아 파출소에 물어 겨우 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는 김수학이라는 사람인데 우리 집이 어딥니까?』 파출소 순경이 황당했을 것이다. 金선배는 참으로 효심이 지극해 고향의 노모를 극진히 모셨고, 고향의 밤나무 밭을 정성껏 관리하는 것을 보았다. 취미가 낚시로 같아서 종종 백학저수지에 함께 갔다. 낚시 실력은 내가 한 수 위였다고 생각하지만, 매운탕 끓이는 솜씨만큼은 金선배를 따를 수 없었다. 갓 잡은 물고기에 산초가루와 숙주나물(金선배는 숙주나물을 녹두에 발이 달렸다고 「녹두발」이라고 불렀다)을 듬뿍 넣은 매운탕 맛을 나는 아직 잊지 못한다. 그 후 金선배는 다른 보직을 받아 나가고 나는 두어 해 보직을 못 받고 기획계에 엉거주춤 남았다. 보직 없는 사무관은 상관도, 부하도, 임무도, 책임도 없는 장교와 같다. 그 어정쩡함은 고아 아닌 고아와 다를 바 없다. 이렇게 장기간 보직을 못 받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軍政(군정) 반대의 선봉에 섰던 부친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실망해서 사표를 낼까 하던 중에 발령이 났다. 바로 金선배의 자리였다. 그 뒤에도 몇 번 김수학 선배와 일을 같이 하거나 후임 자리를 맡았다. 金 선배가 지방국장이던 시절, 나는 그 아래에서 새마을 담당관으로 일했다. 벌거벗은 우리 산하를 푸르게 만든 「치산녹화 10개년계획」을 수립한 것도, 새마을 사업을 세부설계한 것도 이 때였다. 이런 일들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도록 金선배는 나에게 움직일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金선배가 도지사가 되어 나간 뒤 지방국장 자리를 내가 인계받았다. 맑고 소탈하고, 일관되며 성실한 공직자像
金선배는 朴대통령으로부터 치밀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국세청장으로 발탁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지만 우리는 자주 만났다. 주로 일식집 카운터가 애용되는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다가 「잡어회」라는 모임이 생겼다. 광어나 도다리가 아닌 「잡어」들이 모이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나도 잡어회 멤버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두 번째 서울시장을 할 때 金선배와 만났다. 당시 서울시에서는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을 건설하면서 그 부근을 「새천년 신도시」로 개발하고 있었다. 金선배가 이사로 있던 朴正熙대통령기념사업회에서 여기에 기념도서관을 짓겠다고 해서 승낙했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의 사저였던 「梨花莊(이화장)」 개수를 서울시가 도왔던 것처럼 주민들이 이용할 기념도서관 건립은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정부 지원은 끊겼고, 기념사업회 모금활동이 부진해 이 사업은 지금 중단상태에 있다. 朴대통령에게 누구보다 핍박을 당했던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이 스스로 앞장서서 지원하려 했던 이 사업이 중단되고 있는 세태를 金선배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김수학 선배는 내 공직생활의 잊지 못할 선배다. 그의 참으로 맑고 소탈하면서도 일관된 성실한 공직자의 자세는 나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자신의 좌우명, 「매일 매일이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인 것처럼 살아라」라는 잠언대로 살아온 공직자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어떻게 잘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뒤로 미룰 수 없는 오늘의 일」이라는 金선배의 지론, 그 말이 소탈한 그의 모습과 함께 아직도 새롭다.● ▣ 바른 길을 알려준 아버지 「네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代價는 절대 갖지 말라」 손미나 KBS 아나운서 1972년 서울 출생. 고려大 서어서문학과 졸업. 스페인 바르셀로나大 언론학 석사. 1997년 KBS 공채 24기 아나운서로 입사. 「가족오락관」, 「도전! 골든벨」, 「KBS주말 9시 뉴스」, 「세계는 지금」 등 다수의 프로그램 진행. 現 「세상은 넓다」, 「아침마당 토요 이벤트」, 「HAPPY FM 손미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 중. 내 인생의 확실한 가치관을 심어준 아버지 ![]() 부모님은 내 인생 최고의 「멘토」다. 어려운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를 번쩍 안아 주고 업어 주고 손을 내밀어 주셨다. 또한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보여 주신 그 길을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어떤 일이든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셨고, 누구보다 특별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셨다. 아버지는 역사 교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식탁에서부터 늘 고리타분한 『공자는… 』 혹은 『군자는 사람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행동과 말이 똑같다』는 교과서 같은 말씀이 이어졌다. 「塞翁之馬(새옹지마)」를 비롯한 사자성어 풀이를 해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되물어 꿈속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는 답답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인생의 확실한 가치관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환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1년을 보냈다. 당시엔 외교관 자녀가 아니어도 해외에서 2년 정도 공부하면 특채(특별전형)로 대학입학이 가능했다. 『1년 더 미국에 남겠냐』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나는 『이것이 제 인생의 첫 번째 관문인데, 제가 이걸 옆문으로 들어가면 평생 옆문을 찾아다닐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네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代價(대가)는 절대 갖지 말라』, 『돈이든 칭찬이든 뭐가 되었든 스스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받지 말라』던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어느새 몸에 뱄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어떤 일로 갈등할 때마다 「이런 게 있는데 어떠니?」라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셨다. 高3 시절, 大入(대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나는 여름 보충수업을 받는 게 무척 힘이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과감하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충고해 주셨다. 가장 바쁘고 치열한 시기에 「쉬어 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내게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이 있었기에, 나는 방송생활의 절정기였던 2004년 여름, 스페인 유학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학과사무실로 날아온 아버지의 편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편지를 써 주셨다. 직접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좋은 옛 이야기나 지혜로운 글귀로 스스로 생각하게 하셨다. 대학 1학년 초 개강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딱히 통금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술도 조금 마셨고 평소보다 꽤 늦게 집에 들어갔다. 「크게 혼나겠구나」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섰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조금의 야단이나 훈계도 없으니 더 겁이 났다. 그 뒤로도 아무 말씀이 없었고, 나도 최대한 모범적으로 귀가 시간을 지켰다. 며칠 뒤 학과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캠퍼스에 앉아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동안, 가슴이 울컥해졌다. 「… 사람들에게 성인의 여자가 되는 것과 숙녀가 되는 것은 다르다. 네가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나이만 먹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내 딸이 숙녀였으면 좋겠다」 그 가르침은 무서운 꾸짖음보다 컸다. 그날 이후 난 지금까지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생의 교과서처럼 내 삶을 이끌어 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는 헌신적인 희생으로 내 삶을 채워 주셨다. 1000만 분의 1 확률을 이뤄낸 어머니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안과에 갔다가 내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검진결과를 받았다. 의사는 안경을 쓰면 좋아질 수 있다며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킬 게 너무 많았다. 네 살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엔 꼭 안경을 써야 했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안경을 썼다. 어머니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내게 안경을 씌워 주고 잠 들면 안경을 벗겨 주었다. 마지막 검안 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안경 안 써도 된다. 근데 미나야, 너 엄마한테 정말 잘해야 한다. 안경을 써서 시력이 좋아지는 확률은 1000만 분의 1이란다』 어머니는 한결 같은 분이었다. 수능시험 전날 온 가족이 외식을 했다. 「속이 안 좋다」며 저녁을 들지 않는 어머니께 아버지가 『내일이면 미나 시험 보니 이제 당신도 저녁을 먹으라』고 하시는 거였다. 그때까지 몰랐는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금식기도 중이었다. 가슴이 찡했다. 마음이 무거워져 집에 도착한 내게 어머니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배냇저고리를 건네주었다. 「처음 태어나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안고 가면 시험을 잘 본다」는 동네 아주머니들 말에 20년 가까이 간직해 오신 거였다. 「이사도 많이 다녔는데…, 진짜 어머니 사랑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음악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결혼 후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로서 「外柔內剛(외유내강)」을 보여 주셨다. 대학에 들어가니 여자로서 어머니를 더 이해하고 존경하게 됐다. 어머니처럼 겉으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정말 강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절대적인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를 보며 스스로 「힘든 환경에서 뭔가에 도전해 보자」 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첫 도전의 자극제가 되었다. 교환학생 시험을 봤고, 대학 3학년 때 호주로 떠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남동생과 우애가 특별하게 좋은 것도 부모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다닐 때부터 나의 귀가를 지켜봐 주셨다. 지금도 새벽 2시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끝내고 들어가면 두 분이 번갈아 가며 마중 나와 계신다. 부모님은 그 사랑을 통해, 내게 한 번 시작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임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나 또한 마음속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지금도 난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을 찾아 가고 있다.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가르쳐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나 역시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참 귀한 사람입니다』● ▣ 內弟子로 받아준 스승 曺薰鉉 최정상 프로가 제자를 키우는 것은 禁忌, 神의 은총을 생각한다 이창호 프로기사 9단 1975년 전북 전주 출생. 충암高 졸업. 제5기 신왕전 우승, 제3기 동양증권배 우승(세계바둑대회 최연소 우승자로 기네스북 등재), 국내 16기전 사이클링 히트 달성, 제9회 후지쓰배 우승, 제34기 명인전 우승(명인전 6연패), 제5회 엘지배 세계기왕전 우승, 제6회 세계바둑최강전 우승. 제1기 원익배 10단전 우승, 제40기 KT배 왕위배 우승. 現 바둑 9단. 「겸허함과 공정한 눈」을 가르쳐 준 할아버지 ![]() 나는 종교가 없다. 하지만 내가 누려온 그 모든 영예로운 일들이 전지전능한 존재의 은총이었다는 믿음은 갖고 있다. 「내 인생의 멘토」를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듣고 많이 망설였다. 크든 작든 「프로기사 이창호」의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면 그분들을 일일이 열거해야 옳겠기 때문이다. 내 마음 깊이 새겨진 인생의 멘토라면 아무래도 할아버지와 세 분의 스승 그리고 한 분의 선배님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광복 즈음 고향 전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익힌 시계수리 기술과 근면 성실함으로 곧 일가를 이루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중앙동 이 시계점을 모르면 전주사람이 아니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큰 재산을 모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들이를 다닐 만큼 검소한 분이었다. 집안의 어르신들은 보통 장손이나 막내 손자를 귀여워하는데 할아버지는 삼형제 중 둘째인 나를 유독 귀여워하셨다. 더도 덜도 아닌 딱 동네바둑 수준의 棋力(기력)이었던 할아버지는 나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고 동네 정자로 산책을 가거나 기원에 드나들기를 좋아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통해 바둑을 만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바둑돌을 쥐여 주셨지만, 그 일이 내 인생을 결정지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프로 입문에 이르기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베풀어 주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바둑을 둘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특이한 것은 나보다 강한 사람뿐만 아니라 약한 사람과도 두게 했고, 승패에 관계없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사례를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는 내게 「겸허함」과 「공정한 눈」의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떤 상대도 경시하지 마라. 토끼 한 마리를 잡아도 호랑이는 최선을 다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보다 더한 것으로 갚아 주어라』 할아버지의 가르침, 할아버지와 함께한 유년의 기억들은 습관처럼 굳어져 나의 모든 승부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나의 對局(대국) 태도나 바둑 내용을 보고 「平靜心(평정심)은 타고났다」고 한다. 「돌부처」·「강태공」 같은 과분한 별명을 붙여 주었지만, 그것은 나의 천성이라기보다 할아버지의 오랜 가르침이 나의 정신에 스며든 결과이다. 어느 곳에선가 나를 지켜보고 계실 할아버지께서 이런 내 생각에 흐뭇한 웃음을 지어 주셨으면 좋겠다.
세 분의 스승 내게는 세 분의 스승이 계신다. 「프로기사 이창호」라는 작품은 이정옥·전영선·曺薰鉉(조훈현) 세 스승의 작품이다. 내가 어릴 때 「전국구 아마추어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정옥 선생님은 수천 판의 지도바둑을 둬주셨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프로기사 이창호가 될 원석을 캐내 주신 분이다. 작고하신 전영선(프로 7단) 선생님은 그 원석의 흙먼지를 털어내고 보석의 모양을 갖추게 해주셨다. 그리고 또 한 분은 조훈현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중국·일본 바둑에 밀려 변두리 취급을 받던 한국 바둑을 세계 최강의 자리로 끌어올린 분이다. 최초로 「바둑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조훈현 선생님은 오늘의 「프로기사 이창호」를 다듬고 완성해 주셨다. 선생님은 지금 내 나이에, 감각과 취향이 당신과 전혀 다른 나를 內弟子(내제자)로 받아들였다. 세계 정상의 프로가 절정을 달리는 나이에 제자를 받아들이는 일은 프로세계의 「禁忌(금기)」다. 그것도 넓지 않은 집에 부모를 모시는 형편에 집안으로 제자를 받아들여 가르치는 것은, 보통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모험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희생까지 무릅쓰며 나를 받아들여 주셨다. 이 특별한 인연은 종교도 없는 내게 문득, 문득 神(신)의 은총을 생각하게 한다. 1992년 동양증권배 결승에서 만난 린하이펑 선생은 내 삶의 지표가 된 분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되는데, 린 선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나 스스로의 질문에 가장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 주셨다. 린 선생은 동양증권배 결승 5번승부에서 아들보다 어린 내게 역전패하고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절정을 이룬 승부처마다 스스럼없이 나의 의견을 묻는 진지한 求道(구도)의 자세를 보여 주셨다. 바둑판 안팎으로 자연스럽게 비친 선생의 두터운 인품은 내게 큰 감명을 주었고, 그 이미지는 고스란히 내 마음에 투영됐다. 立德勝命 - 덕을 쌓으면 운명을 이겨낼 수 있다 나는 행운아다. 할아버지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았고, 평생에 한 분을 모시기도 어려운 좋은 스승을 세 분이나 모신데다 빠른 시기에 인생의 지표가 될 분을 만나는 행운까지 겹쳤으니 행운아가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조훈현 선생님이 나를 두고 『재능은 있지만 번득이는 천재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노력 없는 최고는 없다. 『노력은, 재능이라는 비단 위에 한땀 한땀 꽃무늬를 수놓는 경건한 정신의 노동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천재라는 말보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내 인생 다섯의 멘토가 내게 준 사랑과 가르침을 따라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 「立德勝命」(입덕승명: 덕을 쌓으면 운명도 이겨 낼 수 있다)이라고 한다. 나의 승부도 나의 삶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 ▣ 내 인생의 등대인 아내 『아내를 제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尹潤洙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회장 1945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高·한국外大 정치외교학과 졸업. 상명大 명예 경영학박사. 해운공사, JC페니, 화승 수출담당 이사, 대운무역 사장, 휠라차이나·휠라골프 부사장 등 역임. 現 케어라인㈜ 대표이사 회장. 인생의 고비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 ![]() 「論語(논어)」에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로 2년 전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耳順(이순: 60세)이 되었다. 이제 세상의 이치를 유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샐러리맨의 우상」이라고들 한다.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평가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 같은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 어려운 시절과 좋은 시절을 보내면서 내 인생의 小宇宙(소우주)를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사람과의 인연 또한 세상의 귀한 이치이리라. 그 사람은 바로 아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내를 가장 존경한다. 한국사회에서 아내와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고 부르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아내만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내 아내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사람을 푸근하게 해주는 여자다. 내 성격은 어디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 치고 받고 일을 벌이며 사는 스타일이다. 아내는 이런 나를 안정시켜 준 사람이다. 특히 20代의 젊은 시절을 암흑 속에서 보냈던 내게 아내는 인생의 「등대」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가장 든든한 지원자로 함께해 준 따뜻한 사람이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 고모님 모시고 신혼생활 아내는 단순한 內助(내조)가 아니라 내 사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아내는 혼수품으로 그때만 해도 귀했던 타자기를 갖고 왔다. 몸 하나 제대로 뉠 만한 방 한 칸 없던 시절, 그 타자기로 남편의 이력서를 수십 장씩 작성해 주었다. 첫 직장인 해운공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미국의 JC페니와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를 거치면서 아내의 조언은 늘 힘이 되어 주었다. 몇 번이나 직장을 옮길 때 보통 사람 같으면 한 번쯤 말리기도 했으련만, 아내는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후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오히려 용기를 준 사람이다.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1984년 여의도에 15평짜리 사무실을 내어 사업을 시작했다. 앉아 있기도 좁은 사무실에 직원은 고작 4명뿐이었다. 아내는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경리이자 타이피스트였으며, 사무실 청소를 도맡아 하고 차로 나를 출퇴근시키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했다. 돈이 없어 사업이 휘청거리면 돈을 구하러 다닌 것도 아내였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0만원도 못 빌리는 성격인데, 아내는 자존심 죽여 가면서 친척이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업 자금을 빌려 왔다. 생활비가 없을 때는 기꺼이 결혼 예물과 아이들 돌반지까지 전당포에 맡겼다. 모 방송국 인터뷰 때 사회자가 물었다.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아내를 제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녀는 내 인생의 등대입니다』 내 인터뷰를 본 주부들이 감동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괜히 입에 발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아내를 향한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다. 1974년 2월에 선봐서 10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 없이 자란 까닭에 나는 유난히 정에 약했다. 아내는 나를 잘 감싸 안아 주었고, 나는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은 것 같았다. 장인이 대한제분의 상무를 역임한 터라 아내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온 아내는 무척 힘들게 살아야 했다. 돈이 없어 신혼 여행을 온양온천으로 잠깐 다녀오고, 결혼 축의금으로 셋방을 마련해 살았다. 게다가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키워 준 고모님을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므로 여러모로 아내는 힘들었을 것이다. 방 한 칸에서 두 칸짜리로, 일부 전세에서 독채 전세로 살면서 이사를 셀 수 없이 다녔다. 그렇게 떠돌다 처음 집을 마련한 것은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17평짜리 연탄 아파트였다. 그래도 아내는 우리 집이라며 나보다 더 좋아했다. 그 후로도 이사는 계속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집으로 옮겨 가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이사를 많이 했지만 이사하는 날 내가 직접 도운 기억은 없다. 이삿짐을 챙겨 본 것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이사하는 날 집에 있질 못했다. 그만큼 집안일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건 고스란히 아내 몫이었다. 회사일로 관공서는 수없이 들락날락거렸지만, 우리 집 관할 동사무소 위치를 모른 채 살았다. 『다음 세상에서도 당신의 동반자가 될 거예요』 또 한 가지 미안하고도 감사한 것은 두 아이를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성인으로 훌륭하게 키워 주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심장병으로 고생한 이후 건강과 가족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지금도 서로 바쁜 생활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진 못하지만 마음만은 항상 가족이란 이름으로 같이 지낸다. 내 곁에 이들을 있게 해준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 30년 넘는 결혼생활에 있어서 우리 부부는 서로의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와 아내는 지금껏 한 번도 서로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우리의 믿음이 있는 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든다.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아내와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옛날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다음 生을 갖게 되더라도 나는 비즈니스맨으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아내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음 세상에서도 당신을 믿는 당신의 동반자가 될 거예요』 아내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 세 선생님 拉北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준 선생님, 내 인생은 축복이었다 柳在乾 국회의원 1937년 서울 출생. 경기中ㆍ高 졸업. 연세大 정외과 졸업. 同대학원 석사, 美 캘리포니아州立大 법학박사. 공군 중위 제대. 유네스코 한국 청소년ㆍ대학생 지도간사, 한국청소년단체 협의회 사무국장, 경원大학장, 열린당 의장, 국회 국방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장, 제15ㆍ16ㆍ17代 국회의원, 국회조찬기도회장, 韓美의원외교협의회장. 세 분의 스승 ![]() 月刊朝鮮의 원고 청탁을 받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인생의 스승」으로 어느 분을 선택해야 할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흔을 앞두고 있는 내게 어찌 한 분의 스승만 있으랴. 나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광복과 한국전쟁 때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공군 장교로 입대했다. 朴正熙(박정희) 정권의 초창기 때 軍생활을 했다. 그런 후 미국으로 건너가 22년을 보낸 후 귀국했다. 한국이 산업화·근대화·군사독재로 뒤엉켜 굴러갈 때, 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보고 배웠다. 국가의 발전 상황이 다른 두 나라를 오가면서 개인·조국·세계를 고민해야 했다. 내 인생의 방향과 삶의 목표를 설정해 준 세 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일생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말라』고 하셨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남보다 더 열심히 살라』고 하셨던 중학교 선생님, 평화 사상을 가르쳐 주셨던 헨리 올렌돌프 목사님. 이 세 분이 내 인생의 멘토다. 1949년, 나는 서울 돈암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5학년 때 담임이었던 金玉錫(김옥석·현재 84세) 선생님이 다시 6학년 담임이 됐다. 당시 27세였던 선생님은 젊은 혈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매우 엄했다.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숙제를 안 해오면 매를 드셨다. 나도 선생님에게 많이 맞았다. 졸업식 때였다. 선생님은 조용히 나를 불렀다. 『매를 든 것은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뜻에서 한 것이니 이해하거라. 중학생이 되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고 책을 가까이 해라. 잠잘 때도 책을 끼고 자거라』 카랑카랑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고, 매서운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선생님의 눈물을 보고 나도 함께 울었다. 책은 나를 키운 양식이었다. 납북된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李奭熙 선생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6·25 전쟁이 터졌다. 어린 나는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다. 옆에서 멀쩡히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이 세상과 이별하는 걸 봤다. 총소리, 탱크소리, 벌건 핏방울로 가득 찬 내게도 이별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拉北(납북)된 것이다. 수업을 하는 둥 마는 둥 중학교 과정이 끝나갔다. 전쟁통에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나는 방황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中3 담임인 李奭熙(이석희) 선생님이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을 불렀다. 나와 김우중(대우그룹 창업자), 유태환(前 한국일보 기자)이 선생님 앞에 섰다. 선생님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위로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공부에 매진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라』고 위로해 주셨다. 「君師父一體(군사부일체)」라고 하면 진부한 표현일까? 마음이 담긴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너무나 큰 위로가 됐다. 아버지처럼 느껴졌던 李奭熙 선생님.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선생님은 나의 후원회 행사에 꼭 참석하신다. 인생의 고비마다 나타난 아버지 같은 스승들 1964년 장교로 병역을 마쳤지만 「아버지가 납북됐다」는 이유로 주위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를 받았다. 나는 軍에서 배운 영어실력을 기반으로 한국 유네스코 대학생 간사로 일을 했다. 1966년, 美 국무성이 후원하는 세계 청소년 친선 프로그램인 「CIP」에 참가했다. 16代 국회의원을 지낸 이연숙 의원이 한국 걸스카우트 대표로 함께 갔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의 유명 사회운동가인 헨리 올렌돌프 목사가 주관했다. 올렌돌프 목사는 「옥중서신」, 「나를 따르라」라는 책을 쓴 본 해프 목사와 함께 「기독교의 현실 참여」를 적극 주장했던 인물이다. 6개월간 진행된 CIP 프로그램은 내게 思想的(사상적) 변화를 가져왔다. 올렌돌프 목사는 세계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꿨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 청소년의 평화교육이 중요하다고 봤다. 이런 취지로 추진된 것이 바로 CIP 프로그램이었다. 100여 개국에서 150명의 청소년이 참석했다. 올렌돌프 목사는 내게 『앞으로 한국은 아시아의 지도자 국가가 될 것이다. 돌아가서 청소년을 지도하는 일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귀국 후 곧바로 한국청소년단체 협의회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의 한국청소년연맹의 모체이다. 나는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었지만 인생의 고비마다 아버지 같은 스승들이 나타나 내게 갈 길을 보여 줬다. 그래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 최창봉 KBS 드라마 국장 『너는 지금 도둑이 됐다. 옷을 벗어라』 金在衡 드라마 PD 1936년 충북 음성 출생. 경기商高·동국大 국문과 졸업. CBS 성우 1기. KBS성우 2기. KBS 제작부국장 역임. 現 동국大 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석좌 교수. 연출작 「영이의 일기」, 「 국토만리」, 「달동네」, 「비가비」, 「사모곡」, 「인목대비」, 「별당아씨」, 「한명회」, 「용의 눈물」, 「여인천하」 등. 한 달을 연습한 대사 『네, 네, 네, 네』 ![]() 나는 내 인생에서 세 분의 「멘토」를 만났다. 경기상업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학교 연극반을 맡고 있는 박영민 선생님과 만났다. 내 드라마 연출 인생의 첫 단추가 그때 잠가졌다. 朴선생님은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KBS에서 성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 웅변부에 있었다. 행운이었을까. 웅변에 꼭 필요한 발성 연습을 朴선생님이 봐주셨다. 나의 발성이 마음에 드셨는지 朴선생님은 내게 연극을 권했다. 그래서 학교 연극제에서 「양만춘」이라는 극에 참가했다. 내 대사는 『네, 네, 네, 네』 단 네 마디였다. 이 네 마디를 한 달 동안 연습한 후 나는 양만춘의 문지기로 연극무대에 처음 올랐다. 단 네 마디의 대사를 위해 한 달을 쏟아 부은 내 정성이 기특했는지 朴선생님은 『연극을 해보는 게 어때』 하며 연극반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朴선생님의 권유로 들어간 연극반 생활이 「예술가」·「연출가」라는 호칭을 평생 내 이름 앞에 붙이고 사는 계기가 됐다. 연극반에 들어간 다음 해 우리는 유치진의 「원술랑」을 무대에 올리게 됐다. 내겐 기회였다. 연극반 경력을 기준으로 주연을 뽑는 것이 아니라, 전교생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해서 주연을 뽑기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내 연극 경험은 연극 「양만춘」에서 양만춘 집의 문지기로 나와 『네, 네, 네, 네』를 한 것이 전부였다. 연극배우 김동원씨의 대사를 연습해 오디션에서 흉내낸 것이 주효해 주연을 맡는 행운이 돌아왔다. 「원술랑」은 호평을 받았다. 그해 겨울 한국연극학회에서 전국 고등학생 연극제를 열었다. 朴선생님이 지도한 「사육신」이라는 연극에서 나는 세조 役(역)을 맡았고,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렇게 연극을 통해 내 끼를 발산하고 있을 때 朴선생님은 내게 『인생의 業(업)으로 연극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 『네가 가진 끼를 세상에 펼쳐라』고 권하셨다. 연출가로서의 첫 작품 「푸른 정」
연세大 정치외교학과 진학에 실패하고 희곡작가가 되겠다고 들어간 동국大 국문과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인생의 기회를 맞게 된다. 내게서 연출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해 준 스승 이근삼 교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동국大 동기들인 故 이철향, 故 김순철, 배우 최정원, 최불암 등과 함께 「신무대 실험극회」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동국大 선배이자 당시 동국大 학생과장이던 李교수는 우리들을 많이 아껴 주었다. 李교수 본인의 첫 희곡작품인 「푸른 정」을 우리의 첫 공연극으로 기꺼이 내주었다. 「푸른 정」은 내 첫 연출작이다. 당시 을지로에 있던 「우미관」에서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李교수는 내게 연출을 권했다. 훗날 성우에서 드라마PD로 인생항로를 수정을 하게 된 데는 연출가로서의 재능에 대해 끊임없이 칭찬해 준 그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1962년 나는 KBS 개국 준비요원으로 드라마PD가 됐다. 드라마PD가 되어 「CK소극장」이라는 코너를 맡고 있던 나는 당시 KBS 드라마국의 최창봉 국장을 만나게 된다. 최창봉 국장의 질책, 『너는 지금 도둑이 됐다』
나는 단막극 「CK소극장」을 준비하기 위해 미국문화원에서 단편영화를 즐겨 봤다. 당시 「포경선」이라는 작품의 화면이 너무 아름다워 동일한 제목의 KBS 단막극 「포경선」을 만들었다. 내가 본 단편영화의 화면을 그대로 내 드라마에 삽입했다. 방송이 끝나고 내 드라마를 본 崔국장이 나를 국장실로 불렀다. 드라마국 최고 책임자가 가장 막내 PD를 자신의 방으로 직접 부른 것이다. 그는 내게 변명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나를 몰아쳤다. 『남의 작품을 그대로 쓰는 것은 도둑질이다. 너는 지금 도둑이 됐다. 연출가는 끊임없이 창작을 해야 하는 존재다. 아무리 작은 드라마를 만들더라도 자기 색깔이 없는 것은 만들지 말아라. 또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옷을 벗어라』 나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최창봉 국장의 질책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저 그런 연출가로 머물렀을 것이다. 최국장의 꾸지람을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고,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분발했다. 세 분의 스승들은 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의 「멘토」로서 내 인생과 함께할 것이다.● ▣ 케네디 美 대통령 「발상의 전환」과 「도전정신」을 심어준 그의 취임 연설 금난새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1947년 부산 출생. 서울藝高·서울大 작곡과 졸업. 독일 베를린국립음악大 지휘과 수료.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KBS 교향악단 지위자,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독일 챔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現 경희大 음대 교수,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기도립 교향악단 예술감독. 내 이름이 「금난새」인 이유 ![]() 내 이름은 독특해서 한 번 들으면 오랫동안 잊기 어렵다. 나는 1947년 부산에서 金씨 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셨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성을 「금」씨로 바꾸었고, 나와 형제들에게 순 우리말 이름을 선물했다. 내 이름 「난새」는 「하늘을 훨훨 나는 새」라는 의미다. 지난 60년간 내 이름처럼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도록 해준 힘은 무엇일까? 내 이름처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스승은 학창시절 선생님도, 친구도 아니었다. 중학생 때 나는 존 F 케네디 美 대통령의 취임연설 중 한 구절을 우연히 듣게 됐다. 이 한마디가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됐다.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라』 흑백 TV 속 케네디 대통령의 이 말이 반항기로 가득 찬 중학 1년생에게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평생의 「멘토」가 되었다. 「멘토」라는 말이 나올 때면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1960년대에 경희중학교를 다녔다. 위로 형이 한 분 있었는데, 형은 영어를 잘했다. 형과 달리 나는 영어를 제일 못 했고, 영어를 잘하는 형에 대한 부러움과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학교 근처 골목 낡은 판잣집 벽에 붙어 있는 「영어교습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영어를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교습소에 등록을 하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내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은 연세大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부부 대학생이었다. 이분들은 특히 영어웅변을 잘했다. 영어웅변 연습을 하며 만나게 된 나의 「멘토」
그들은 내게 영어웅변도 가르쳐 주었다. 난 영어보다 웅변이 더 재미있었다. 영어교습소에서 공부하던 내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친구들 중에서 영어 성적이 가장 나빴던 내가 학교 영어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후로 영어 공부가 즐거웠다. 특히 영어웅변은 내 생활 속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교습소 선생님이 영어 원고를 써 주고, 시범을 보이면 나는 길을 걸으면서 그 원고를 외웠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스스럼없이 해설하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이때부터 쌓인 것 같다. 영어웅변을 배우던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웅변조의 영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 노력했다.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말들 중에서 유독 명확히 들리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로 시작하는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라」는 구절이었다. 어린 내게 「국가」나 「요구」 같은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나는 케네디의 연설을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남들을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대로 해석이 됐는지 몰라도,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케네디의 연설은 내 삶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神의 계시처럼 내게 다가왔다. 독일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2년 동안 몸담았던 KBS 교향악단을 떠나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수원시향)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민간 오케스트라단을 만든 것은 중학생 시절 들은 케네디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 먼저 다가가는 공연 KBS 교향악단을 떠나 수원시향으로 옮길 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당시 한국의 음악가들은 외국으로 진출하거나 국립교향악단으로 가고 싶어 했고, 거기에 매달렸다. 지방의 이름 없는 교향악단으로 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다. KBS 교향악단에서 수원의 지방 교향악단으로 가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잘나가는 대기업 직원이 열악한 영세기업으로 가는 것과 비슷한 선택이었다. 나는 권위나 과시를 생각하지 않았다. 「문화는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하고, 수원이나 경기지역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통해 좀더 많은 문화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면 지휘자로서 내 일을 다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생각대로 행동했다. 수원시향으로 옮긴 후 나는 단원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가자』고 주문했다. 이런 열정이 통해서인지 한해에 10회 정도 공연을 하던 수원시향이 연간 80회 이상 공연을 하게 됐다. 청중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청중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클래식 음악에 무감각할 것만 같던 수원시민이나 경기도민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나의 수원시향行을 말렸던 사람들이 그전보다 더 뜨거운 신뢰를 내게 보내 주었다. 케네디의 연설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라는 말처럼, 나는 사람들이 나와 수원시향을 인정해 주기 바라지 않고, 우리가 먼저 클래식 음악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 우리의 음악을 들려 주었다. 이것이 내가 더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되게 해주었다. 새롭게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경기도 교향악단을 이끌며 다시 한 번 내 인생의 멘토가 된 케네디의 연설문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 신앙의 길을 열어 준 어머니 『너른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 위해 큰살림 해라』 朴淸秀 원불교 교무 1937년 전북 남원 출생. 전주女高·원광大 원불교학과 졸업. 동국大 대학원 불교철학과 졸업. 원불교 사직교당 교무, 원불교 전국청년회 회장, TOU국제다종교협력기구 이사, 원불교 평양교구장 역임. 現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전인학원 이사장, 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스물일곱에 남편 잃고 두 딸을 키운 어머니 ![]() 『시집, 그까짓 시집 뭣 하러 가냐? 다른 길이 있는 줄을 모르면 여자로 태어나서 시집을 안 갈 도리가 없지만,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하러 시집을 가. 너는 이제 커서 꼭 교무(원불교 교역자)가 되어라. 기왕이면 한평생 너른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위해 살고, 큰살림을 해라』 어머니가 어린 내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한 말씀이다. 그 시절, 내가 자란 시골에는 시집와 사는 여자 중에서 그다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고, 어쩌다 새로 시집온 새댁들도 남몰래 눈물을 지었다. 좀더 성장한 훗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우리 어머니 역시 전형적인 한국 여인으로 기구하게 한평생을 사셨다. 엄격한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쉽지 않은데다 스물일곱에 남편과 사별했다. 아들 못 낳으면 쫓겨나던 시절에 아들 없이 두 딸을 길러야 했던 어머니의 고난을 길게 얘기해 무엇하랴? 어린 내 눈에 비친 원불교 교무는 우리 어머니가 지성으로 섬기는 분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극진히 모시는 귀한 분으로 비쳤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經(경) 읽듯이 말씀하신 대로, 교무가 되는 것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만약 교무가 된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공부시킬 테다』고 다짐했다. 나는 어머니의 신념대로 남원 산골에서 전주로 유학을 와서 전북여중과 전주여고를 졸업했다. 내가 전북여중을 입학하던 그해 6·25 전쟁이 터졌으니, 그 시절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한 셈이다. 그 시절은 여고를 졸업했다고 해서 쉽게 외출복을 사서 입기 어려운 때였다. 나는 하얀 선 한 줄을 떼어낸 교복을 입고 외가댁에 다녀왔다. 외가댁에서 돌아와 안방에 들어섰을 때 긴 한복 검정치마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치마가 원불교의 貞女(정녀)가 되기 위해서 내가 입어야 하는 것임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총부에서 널 오라시는 전갈이 왔다』 어머니는 큰 소원이라도 성취한 분처럼 행복한 표정이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더 값진 일, 더 큰 일,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살기 위해 교무가 되어야 한다」고 몇 번이고 되뇌이고 다짐했다. 어머니와 내가 그토록 오래 소망했던 바람이 이루어졌는데도 엄청난 긴장감이 나를 휩싸고 있었다. 수도자의 길, 그 忍苦(인고)의 세월이 누르는 무게를 느꼈기 때문이다. 오래 전 예정된 출가였지만 새삼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가깝게 지낸 친구와 모든 인연 있는 분들에게 마치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편지를 썼다. 물론 나의 주소 쪽은 비어 있었다. 쌓인 관계의 정리였고 단절의 예고였다. 어머니의 편지, 「어미까지 제도할 수 있는 道人이 되라」
여고를 졸업하고 20여 일 만에 나는 세속의 삶과 결별하고 원불교 貞女가 됐다. 그리고 어머니의 희망처럼 교무가 되기 위해, 아직 봄바람이 차갑던 봄날에 출가의 길을 떠났다. 그렇게 해서 나는 원불교 교무가 되었다. 30代의 교무로 일하고 있던 시절, 5월15일 스승의 날이었다. 어머니는 소포와 함께 賀書(하서)를 보내 주셨다.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 옷과 글이 들어 있었다. 「너는 대중의 정신을 깨우쳐 주는 큰 스승이 되고, 어미까지도 제도할 수 있는 법력 있는 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축수한다」 못난 딸이 훌륭한 스승이 되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내 교역자 인생을 이끈 가장 큰 가르침은 『기왕이면 한평생 많은 사람을 위해 살고 큰살림을 하라』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어머니의 말씀을 표준삼아 살아왔다. 그리고 원불교 정산종사의 『이제는 천하가 한집안 되는 때라, 앞으로는 어떤 지도자든지 세계주의로 나아가야 크게 성공하리라』는 법문을 따라왔다. 나는 올해 출가 50년을 맞았다. 너른 세상 많은 사람을 위해 살아오다 멀리 北인도 히말라야 雪山(설산) 라다크의 산촌 어린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숙학교를 세웠고, 히말라야 오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대의료의 혜택을 힘입을 수 있도록 50병상의 종합병원을 세웠다. 지뢰가 많이 묻힌 캄보디아에서 지뢰를 제거하고, 아프리카 15개국에 의약품을 보냈다.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돕고, 호수 물이 말라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우즈베키스탄의 아랄海 지역 고려人들을 남부 러시아 볼고그라드 곡창지대로 이주시켰다. 너른 세상 큰살림 지구촌 곳곳에서 지진·화산폭발·허리케인 등 긴급 재난이 생길 때마다 지원해 세계 55개국을 도왔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인 캄보디아 제2도시 바탐방에 세워진 무료 구제병원에는 매일 100여 명의 환자들이 찾는다. 국내에서는 천주교의 복지시설 성나자로 마을의 나환자를 31년 동안 도왔다. 또한 대안학교인 영광의 성지송학중학교와 용인의 헌산중학교, 북한이탈 청소년 새터민을 위해 안성에 한겨레 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나의 발길이 53개국에 닿았고, 나의 손길이 55개국에 미칠 수 있었다. 어머니가 열어 준 길을 쉼없이 걸어온 결과다. 사람들은 때로 나를 소개할 때 『남을 위해 좋은 일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너른 세상에 나가서 큰살림 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내가 그만큼 실천했다는 얘기일까?● ▣ 대한매일신보 사장 영국인 裵說 벅찬 도전의 대상이자 나를 달리게 한 推動力 鄭晉錫 한국외국어大 명예교수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外大 사회과학대학장, 언론중재위원, 방송위원 역임. 現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저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언론사」, 「인물 한국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조선총독부」 등. 「비밀기록」 ![]() 영국인 裵說(배설·E.T.Bethell)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1976년 3월 초였다. 한국언론사 연구의 개척자인 은사 崔埈(최준) 선생님께서 「軍國(군국) 일본의 對韓(대한) 언론정책」과 「梁記者(양기자) 구속을 에워싼 영·일 간의 외교 교섭」이라는 논문 두 편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영국인 배설이 발행한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에 관련된 통감부의 비밀기록이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 소장되어 있다는 부분이었다. 「비밀기록」이라는 대목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것도 영국과 일본이 신문을 둘러싸고 벌인 외교교섭의 내막이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남산에 있는 국편을 찾아갔다. 당시 국편은 남산 드라마센터 인접한 건물에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1904년 배설이 한국에 온 이후 신문을 발행하면서 일어난 여러 사건과 관련한 통감부의 문서를 처음 보았다. 그 자료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입수한 날은 30년 전, 정확히 1976년 3월30일이었다. 나는 곧장 자료 카드를 만들면서 내용을 검토하고 연구에 돌입했다. 영국과 일본의 외교문서와 방대한 비밀기록을 어렵사리 입수해 한국·영국·일본 세 나라의 자료를 대조하면서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하는 단계에 도달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裵說의 무덤이 당인리 화력발전소 근처 양화진의 외국인 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 나섰다. 무더위가 최고조에 달했던 1976년 7월 말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근처 동네 사람들에게 묻고 물으면서 민가의 좁은 골목을 돌아 철조망이 엉성하게 둘러쳐진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외국인 묘지에 올라가니 그의 무덤이 나타났다. 平土葬(평토장)으로 封墳(봉분)은 없었으나 「대한매일신보 사장 대영국인 裵說之墓(배설지묘)」라는 검은 烏石(오석)에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을 쓴 논객 張志淵(장지연) 선생이 지은 비문을 일제가 깎아 버린 흔적이 뒷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裵說의 무덤 1964년 언론인들이 작은 돌에 비문을 새겨 원래의 비석 옆에 세워 두었다. 그곳에서 느꼈던 깊은 감동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묘지에 오는 동안 땀에 젖은 내 몸은 숙연한 감정에 휘말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소리 없이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곳, 서울에서도 한적한 이곳에 풍운의 언론인 배설이 잠들어 있구나!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에 와서 12년간 무역업에 종사했다. 하늘이 보낸 것일까. 인연이 없던 한국에서 5년, 36세의 짧은 生(생)을 마친 배설의 발자취가 거기 멈춰 있었다. 강변도로도 없었고, 주변이 개발되기 훨씬 전이어서 고즈넉한 산속 같은 분위기의 언덕이었다. 배설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묘지로 올라가는 언덕 아래는 콩밭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달라진 모습이다. 주차장과 옆에는 작은 공원까지 조성되어 있다. 그동안에도 세월은 쉬지 않고 흘렀지만 연구를 계속할수록 나는 그 인물에 매료되었다. 내 거실에 그의 사진을 걸어 둔 것은 그 무렵이었다. 흰 중절모자를 비스듬히 눌러 쓰고 사파리 상의에 좁은 넥타이를 맨 스포티한 차림이다. 가슴에 달린 주머니 밖으로 드리워져 있는 시곗줄과 주머니 안 시계의 무게로 사파리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100년 전의 그 모습으로 지금 길거리에 나선다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35세 청년의 멋진 평상복 패션이다. 배경에는 한옥 처마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사를 다니면서도 이 사진은 늘 내 방에 걸려 있었는데 2년 전 정년을 맞아 서가와 집안 가구를 再배치하고 새로 도배를 하면서 떼어 냈다.
그를 찾아 떠난 영국 짧지만 극적이었던 배설의 생애에 매료되어 나는 영국까지 가서 그의 행적을 더듬어 나갔다. 1985년 1월이었다. 런던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배설 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와 이에 대응한 영국의 방대한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배설을 한국에서 추방하거나 신문발행을 금지시키려는 일본의 공작과 집념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본 외무성이 편찬한 「일본외교문서」는 배설 항목을 따로 구분했을 정도로 중요한 외교 문제였다. 나는 한눈 팔지 않고 혼과 정열을 쏟아 부어 연구에 매진했다. 신문기사와 배설의 학적부, 인구조사 기록에 나타나는 그의 가족관계·출생·결혼·사망신고서, 배설 아버지의 유언장, 배설과 그의 동생이 설립한 무역상(「배설 브라더스」: 이 회사는 현재 런던에서 영업 중이다)까지 찾아냈다. 배설의 며느리를 만난 것은 내 연구의 가시적인 성과였고, 기적이었다. 그 자료들로 나는 1987년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프레스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배설은 일제의 탄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생명을 바쳐 싸웠다. 언론투쟁과 병행해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섰다. 의병의 무장투쟁이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라고 통감부는 주장했다. 그는 통감부의 고소로 두 차례나 재판을 받아 중국 上海(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고초를 겪었다. 일제와 싸우면서 받은 스트레스로 배설은 36세의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永生(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배설은 완벽한 인격을 지닌 영웅은 아니었다. 성격은 급했고, 인간적인 결함도 있었다. 독한 위스키와 시가를 즐겼으며 코믹송을 잘 불렀고, 스포츠를 좋아했다. 일본 고베에서 살 때에는 인력거꾼과 요금문제로 싸움이 붙어 병원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나의 연구 범위가 배설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나의 言論史(언론사) 연구의 중심에는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그 주인공 배설과 그의 동반자 梁起鐸(양기탁)이 있다. 대한매일신보 연구의 연장선에 일제 강점기 당시 총독부의 기관지가 된 매일신보가 이어진다. 작년에 출간한 나의 「언론조선총독부」라는 책도 그 성과물이다. 배설은 나의 연구에 불을 지펴 준 인물이다. 이와 함께 그의 神話(신화)를 깨뜨리고 인간으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은 내 연구의 일관된 과정이면서 결론이었다. 런던대학의 지도교수는 내가 배설의 脫神話(탈신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배설은 나의 멘토인 동시에 신비를 벗겨야 할 역사적 인물이었다. 벅찬 도전의 대상이면서 내 인생의 절정기를 후회 없이 불태울 수 있도록 만들어 준 활력소이고, 推動力(추동력)이었다.● ▣ 꾸밈없이 정직했던「론」부장 부하의 과오는 내 것으로 功은 부하에게 車錫勇 LG생활건강 사장 1953년 서울 출생. 경기高·美 뉴욕주립大(회계학) 졸업. 美국 공인회계사. 코넬大 경영대학원 석사(MBA). 인디애나大 로스쿨 수학. 美 P&G 입사, 필리핀 P&G 이사, P&G 아시아지역 탬폰 사업부 총괄본부장, P&G-쌍용제지㈜ 사장, 한국P&G㈜ 사장, 해태제과 사장 역임. 직장동료의 솔직한 苦言 ![]() 나의 첫 직장은 미국 P&G 본사였다. 입사 동기들보다 늦은 32세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후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일주일간의 교육 프로그램 마지막 날, 교육 참가자들이 동료들 앞에서 약 15분간 자신의 포부와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에 느낀 점들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들뜬 마음에 별다른 준비 없이 발표를 마쳤고 그 후 모두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때 입사동기 중에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테드라는 친구가 『얘기 좀 할 수 있냐』며 내 곁으로 왔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나의 발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해 주었다. 『너는 외국사람이고 우리처럼 영어를 잘 못하지? 그런데도 오늘 너의 발표는 미리 준비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 앞으로 경쟁이 심한 P&G 같은 데서 살아남으려면 너는 우리의 두 배 이상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저녁을 먹기는커녕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그 친구의 말이 백 번 옳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 후 나는 회사 문을 여는 오전 5시30분에 출근하고, 문 닫는 오후 10시에 퇴근했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서 週中(주중)에 미진했던 일들을 다시 보고 보완해 나갔다.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니 실수도 적어지고 업무의 질도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입사 2년 후 회사 핵심부서 중 하나인 기획총괄부로 발령받았는데, 여기서 기획총괄부장인 론 부장을 만나게 되었다. 론 부장의 부하 사랑 첫 출근하던 날, 론 부장은 자신이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부대에서 일하던 「하우스 보이」와 똑같이 생겼다며 농담을 걸어 왔다. 가뜩이나 언어문제로 열등감을 느끼던 나는 그의 농담에 몹시 부끄러웠다. 항상 밝고 농담을 잘하던 부장은 조그만 빈 양주병을 책상서랍에 넣어 놓고, 우리 부서가 상사에게 꾸중을 들은 날이면 병째로 양주를 들이키는 흉내를 내어 부서원들을 킥킥대게 했다. 그는 가끔 나에게 『내가 베트남戰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싸웠는데 한국 사람들 진짜 무섭더라』며 내 앞에서 무서워하는 시늉을 했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짐이라는, 은퇴를 1년 여 남긴 나이 많은 직원이 있었다. 제일 일찍 회사에 나와 꼼꼼하게 숫자 하나하나를 점검하는 아주 성실한 분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매우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짐은 특히 상무를 유난히 무서워해서 상무가 우리 사무실 근처로 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손을 부들부들 떨며 심하게 긴장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무서운 상무에게서 짐이 질책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가 준비한 기안서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인데, 상무의 성난 목소리에 짐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긴장을 하고 있었다.
가혹할 정도의 냉정함으로 일을 가르쳐 이때 론 부장이 그 사이를 막아서며 『짐의 기안서는 내가 그렇게 만들라고 해서 준비한 것이니 나를 꾸짖어 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짐 대신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그날도 어김없이 빈 양주병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시늉을 하며 미안해하는 짐과 우리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그가 농담 잘하는 분위기 메이커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에 있어서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했고, 그것은 바로 부하직원들의 실력 향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론 부장과 특별한 인연은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맺어졌다. 미국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고는 하지만 미국 일류기업의 업무기안, 정보보고서를 쓰려면 보통 영어 이상의 문장력이 필요했다. 영어구사 능력이 미숙한 나로서는 복잡한 비즈니스 현안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내가 기안서를 작성해 결재를 올리면 부장은 아주 깐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다시 쓰라고 돌려 주었다. 어떤 때는 같은 기안을 여덟 번, 아홉 번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철저하고 혹독했다. 론 부장의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황하게 몇 장에 걸쳐 상황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때로는 핵심을 꿰뚫는 두 줄짜리 메모가 스무 페이지의 보고서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의 가혹함 덕분에 나는 비즈니스의 주요 현안을 조리 있게 정리해 보고하는 능력을 빠른 속도로 개선시킬 수 있었다. 그 후 P&G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뼛속까지 드러내는 정직성」을 요구 론 부장은 직원들에게 「완벽한 투명함」을 요구했다. 『투명함이란 어떤 각도에서 보건 어두운 면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며 『뼛속까지 드러내는 정직성이야말로 업무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자신 앞에 올라온 기안서를 몇 번씩 고쳐 주며 부하직원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보여 준 론 부장, 상대방이 듣기 불편하더라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나의 동료 테드. 나는 가끔 내 주변의 부하직원들이나 동료들에게 론 부장이나 테드만큼의 관심과 열정을 보여 주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만, 그들의 10분의 1만도 못 하고 있다. 그들은 회사 내에서 정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부서內에서 생기는 실수는 모두 자신의 과오로 떠안았고, 부서 성과는 부하직원 개개인에게 돌렸다. 그래서인지 론은 임원진급에서 탈락하고 결국 1992년 부장으로 정년 퇴임했고, 테드는 임원진급 1년여 만에 회사를 떠나 아프리카 난민구호 단체에 들어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며 살고 있다. 꾸밈없이 정직했던 그들의 리더십은 승진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현실적으로 「승진」이나 직장에서의 「성공」이라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부하직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며 동료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 나를 비롯해 그와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기억하며 닮아 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출처] 내인생의 멘토 (스승): 기획특집|작성자 고수복
|
'▒ 성공하는 자기계발 > 인간관계♥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사람을 움직이려 하지말고 포용하라. (0) | 2009/01/21 |
|---|---|
| 최고의 인맥구축 방법 (0) | 2009/01/14 |
| 인맥관리 제대로 하기 18계명 (0) | 2009/01/14 |
| 인맥만들기 비결 10가지 (0) | 2009/01/14 |
| 미모의 여교사가 13세 소년과 사랑에 빠지다? 실제사진 공개!! (0) | 2009/01/11 |
| 인맥 만들기 (0) | 2009/01/05 |
| 내 인생의 멘토 (0) | 2009/01/03 |
| 새롭게 사랑의 정의를 내려보세요..^^ (0) | 2008/12/11 |
TAG KBS교향악단,
LG생활건강,
가난한남자,
강수연,
공인회계사,
관훈클럽,
국사편찬위원회,
국채보상운동,
금난새,
기네스북,
김재형,
나환자,
대안학교,
대한매일신보,
대한제분,
도다리,
드라마센터,
라다크,
로스쿨,
린하이펑,
매일신보,
맹호부대,
목민관,
바르셀로나,
박영민,
박정희,
배냇저고리,
배우최정원,
볼고그라드,
사육신,
사이클링히트,
산초가루,
성지송학중학교,
세상은넓다,
손미나,
손미나의밤을잊은그대에게,
수락산,
수원시립교향악단,
숙주나물,
시러큐스,
시일야방성대곡,
양기탁,
양화진,
온양온천,
우즈베키스탄,
유치진,
이승만,
이연숙,
이창호,
인목대비,
자유당,
조훈현,
존F케네디,
최불암,
캄보디아,
케네디대통령,
한국기자협회,
한명회,
해태제과,
헌산중학교,
혼수품,
휠라골프,
휠라코리아,
흥국사






















댓글을 달아 주세요